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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체코/ 오스트리아 여행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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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투어할인예약"차파는오빠" 2010. 12. 14.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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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츨라프광장 (프라하)

프라하의 신시가지의 일각을 형성하는 최대의 번화가이다. 고단한 체코의 역사가 베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하철 A선과 B선이 교차하는 무스테크 역이 있는 무스테크 광장을 중심으로 L자형으로 교차하는 이 광장은 광장이라기보다는 파리의 샹젤리제처럼 "boulevard"를 이루고 있는 바, 넓이는 무스테크 광장에서 국립 박물관까지 길이 750m, 폭 60m의 대로로서 서울의 명동거리에 비 할 만 하다. 거리 양쪽에는 유서 깊은 호텔과 고급 레스토랑, 백화점, 은행, 사무실들이 늘어서 있고, 휴일에는 늘 인파로 붐비며 여름에는 아래쪽의 무스텍 광장 주변이 노천 까페가 들어선다. 국립박물관의 테라스에서 광장을 내려다보면 광장의 양쪽으로 늘어선 건물의 모습을 자세히 구경할 수 있다

이 광장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말 시장으로 이용되었던 곳으로서 체코 역사의 전환기에는 반드시 등장하는 장소였다.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몰락으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이곳에서 선포되었고, 1948년에는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여 사회주의 공화국이 이 곳에서 선언되었다. 1968년에는 두브체크로 대표되는 개혁공산주의자들이 시도한 '프라하의 봄'이 소련군 탱크부대의 침공으로 많은 체코국민들이 생명을 바친 곳으로도 유명하며, 1989년 11월 18일 프라하 예술아카데미의 학생들과 배우들이 공산정권에 항의하는 데모를 시작하여 결국 자유주의를 획득하였던 '벨벳 혁명'의 역사적 현장도 바로 이곳이 중심지였다.
광장의 동쪽 끝에 보이는 중앙청 모습의 건물이 이 나라의 국립박물관이다. 폭 100m, 높이 70m에 이르는 이 박물관은 광물·동·식물 표본 등을 전시한 자연박물관으로서 국립극장, 예술의 전당과 함께 19세기 후반 체코의 네오 르네상스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꼽힌다. 천장과 1층 방에는 체코 역대 유명인사의 그림과 청동 흉상이 전시되어 있다.
광장에서 국립 박물관 쪽으로 서 있는 동상은 보헤미아의 수호신인 성 바츨라프의 기마 상. 성 바츨라프는 국난의 시기에 중부 보헤미아의 그라니크 동굴에 잠들어 있는 기사들을 깨워서 이끌고 적을 격퇴시켰다는 전설의 왕으로서, 기마 상 앞뒤로 3명의 수호성인인 성 루드밀라, 성 프로코피우스, 성 아그네스의 기념상도 함께 볼 수 있다. 이것은 J.V. 미슬베크의 작품으로 예전의 바로크 식 조각을 대신하여 1913년에 이 광장에 들어섰다. 현재는 동상 아래에 각종 무대가 마련되어 있어 정치 집회나 콘서트 등이 열리고 있다. 동상 앞에는 '프라하의 봄'을 탄압하던 소련군에 저항하다 희생된 사람들(특히 21세의 나이로 분신 자살한 챨스 대학 학생 얀 파라프palach)과 1989년 혁명 당시를 기하는 꽃과 촛불, 사진들이 항상 놓여있다.

가는방법

지하철 A선과 B선이 교차하는 무스테크 역에서 하차

 

베프조바 제브리카 (프라하)

체코의 전통적인 음식은 돼지고기에 감자 또는 KNEDLIKY(체코식 찐빵)와 ZELI(절인 양배추)를 곁들인 식사라 할 수 있다. 그 중 베프조바 제브리카(VEPŘOVÁ ŽEBÍRKA)는 어린 돼지의 등갈비살을 통째로 잘라 매콤한 특제소스를 발라 오븐에 구운 요리로 체코에서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별미 요리이다

 

천문시계 (프라하)

프라하의 명물 천문시계(ORLOJ)는 15세기 프라하 대학의 수학교수였던 하누슈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기발하고도 아름다운 시계에 대한 소문이 유럽 각 국으로 퍼지면서 다른 나라에서도 주문이 쇄도하였다. 그러자 이 시계를 독점하고 싶은 프라하 시청에서는 하누슈 교수가 두 번 다시 시계를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를 장님으로 만들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자신이 만든 시계를 만져보기 위해 시계탑 위에 올라가 시계에 손을 댔을 때 시계 바늘은 그대로 멈추어 400년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1860년 수리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카를교 (프라하)

블타바Vltava(우리에게는 몰다우Moldau로 알려져 있음)강 위에 서정과 낭만이 가득한 황혼을 배경으로 펼쳐진 다리가 카를 다리(챨스 브리지Chales Bridge)이다. 1357년 건설하기 시작하여 1406년 카를 4세에 의해 완공되었다. 동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 현존하는 유럽 최고의 다리로 손꼽힌다. 이곳에는 예전에 유디타 다리Juditin most라는 이름의 다리가 있었으나 1342년의 홍수로 소실된 이후 당시에 최고 수준의 기술을 동원하여 새롭게 세운 것이 카를 다리라고 한다. 길이 520m, 폭 10m의 보행자 전용으로 차량통행이 금지되어 언제나 노점상과 거리의 예술가, 관광객들로 붐 빈다.

다리의 가장 큰 특징은 조각상이 양측 난간에 15개씩 합계 30개가 늘어서 있다는 것이다. 로마 산탄젤로 성에 있는 베르니니의 조각에서 힌트를 얻어 1683년부터 프라하의 기독교 순교 성자인 중요한 네포무크의 조각상을 시작으로 기독교 성인 30인의 조각상(사암을 사용)을 다리 난간에 세우게 되었다. 이 다리가 세워진 후 점진적으로 카톨릭은 중세 생활권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으로 입지를 굳혀 갔다. 17~19세기에 걸쳐 제작된 이 동상들은 성서를 주제로 만들어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다리의 양끝에는 총 3개의 탑이 있다. 그 중 프라하 성 쪽으로 두 개의 탑이 있고, 구 시가 쪽으로 하나의 탑이 있다. 프라하 성 쪽의 두 탑 중 조금 낮은 탑은 주디교의 잔재로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지은 것이며, 키 큰 탑은 15세기의 고딕양식으로 지은 것이다. 구 시가지 쪽의 탑은 14세기에 만든 것으로 유럽 고딕양식의 최고봉에 속한다. 이 탑들은 원래 통행료를 징수하거나 다리를 지키기 위하여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일반에게 개방되어 있다.

다리를 건널 때는 프라하 성 쪽을 향한 난간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다리 중간쯤의 난간에 독특한 모양의 부조가 새겨져 있는데, 그 위에 손을 얹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한번씩은 만지고 가기 때문에 그 부분만 반들반들 윤이 나서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카를 교에 석양이 비치며 떠오르는 실루엣을 프라하 성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프라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다. 여름 밤에는 다리 곳곳에서 노래판이 벌어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모일 수 있도록 터 놓은 자유공간, 세계 각지의 젊은이들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우정을 나누기 위해 이 곳을 찾는다

 

프라하성 (프라하)

건축의 도시 프라하의 심장이 되는 곳이 프라하 성이다. 체코를 찾는 이들의 대부분이 프라하 성(특히 야경)을 보기 위해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프라하 관광의 핵심이 된다.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고딕과 르네상스, 바로크, 네오 고딕에 이르는 천년 이상의 건축사를 웅변한다. 체코의 국가적 상징물인 동시에 통치자들의 궁전으로 870년경 처음 건축되기 시작된 이래 수 차례의 변천을 거쳐 14세기 카를 4세 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18년 이후로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성 정문 앞에서는 매시 정각에 근위병들의 교대 식이 행해진다. 이 중 정오에 벌어지는 교대 식이 가장 볼 만하다. 이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파노라마는 프라하의 역사를 건축미술을 통해 한 눈으로 읽게 해주고 있다.

길이 570m, 폭 128m인 프라하 성은 전 세계의 현존하는 중세양식의 성 중 가장 큰 규모이다. 동서로 길게 펼쳐진 이 성의 입구는 흐라트차니 광장에 면한 서쪽 정문과 말라스트라나 쪽의 동문, 성 정원쪽의 북문이 있다. 각 문에는 위병 2명씩이 지키고 서 있다. 위병은 7시부터 23시까지 1시간마다 교대한다. 정분에서는 매일 정오에 화려한 위병 교대식이 펼쳐지기도 한다.

프라하 성이 현재의 중요성을 갖게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14세기 카를 4세(1346~78년 재위)때의 일이다. 그는 왕궁을 재건하고 성 비토의 성당을 세우면서 프라하 성을 완전히 새로운 모양으로 단장하는데 이 때부터 이 성은 국가적 상징물이 되었다. 15세기 말 국왕이었던 블라디슬라프 2세 치하에서 후기 고딕 양식적인 요소가 가미되었고, 1526년 합스부르크 왕가가 보헤미아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을 때부터 르네상스 적인 건축이 프라하 성을 점점 복잡하고 정교한 것으로 말들었다. 프라하 성의 건축 양식상 완결은 바로크시대에 이루어졌다. 1753년~1775년 사이에 외관은 현재와 같이 결정되었고, 1918년 대통령의 관저로 바뀌면서 건축가 Josip Plecnik에 의해 성의 내부장식과 정원이 새로 정비되었다.

프라하 성은 수많은 건물들이 모여 하나의 로열 타운을 이루고 있는데 중심 건물은 성 비토 성당이다. 정문에서 바로크 빌딩으로 둘러싸인 게이트를 두 번 지나면 나온다. 카를 4세 때 부터 짓기 시작한 성비토 성당은 50년 이상에 걸친 네오 고딕양식(1873~1929)의 가미와 함께 약 6백년의 공사기간을 기록하며 완성되었다. 내부에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뛰어나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체코의 화가 알폰소 무하의 그림으로 1936년에 만들어 졌다. 성내의 다른 기념물로는 성내에서 가장 오래된 성 이르지 교회가 현존하고 있다. 성 옆의 계단 위에 서면 유유히 흐르는 블타바강과 아름다운 프라하 시내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다.

관광안내센터에서는 프라하 성의 간단한 지도 및 관광자료(주로 영어 표기)를 제공하는 이외에 기념품이나 선물 용품 등도 판매하고 있다.

가는방법

프라하 성까지는 말라스트라나에서 언덕을 올라가 이동하는 방법이 가정 일반적이다. 말라스트라나 광장에서 네르다 거리로 들어가 걷다가 도중에 커다랗게 꺽어진 Ke Hradu거리의 언덕을 끝까지 올라가면 프라하 성 입구인 흐랏챠니 광장이 나타난다

 

멜크수도원 (멜크)

도나우강(江)과 멜크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하우(Wachau) 계곡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한다. 로마제국의 군사 주둔지였으며, 976~1106년 동안 바벤베르크(Babenberg) 왕조의 수도가 있었다. 1106년 바벤베르크 왕조가 왕궁과 주위 땅을 베네딕투스 수도회에 기증하였고 1702~1726년 개축을 통해 웅장한 베네딕트 수도원(멜크 수도원)이 탄생하였다.

유럽 최대의 화려하고 멋진 바로크 건축물로 꼽히는 이 수도원은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자 철학자인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가 쓴 추리소설 《장미의 이름 The Name of the Rose》의 배경이 된 곳이며, 도서관에는 10세기부터 전해지는 1,800여 권의 필사본을 비롯하여 10만여 권의 장서가 소장되어 있다. 또 도서관에는 파울 트로거(Paul Troger)의 유명한 프레스코화가 보존되어 있고, 대리석 홀은 지금도 컨벤션센터와 전시장소로 이용된다. 수도원 주위의 정원에는 타운홀(Town Hall) 광장과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교구교회가 있다

 

망토다리 (체스키크롬노프)

버스주차장에서 구시가지로 갈 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곳으로 이곳을 통과해야 아름다운 도시를 만나게 된다. 사람들이 다니는 다리 아래 쪽 길은 처음에 해자였으며 다리는 서쪽 성을 연결하는 부분이다. 이 다리의 이름은 서쪽 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요새화 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3층으로 된 아치모양의 다리는 무거운 돌기둥이 버티고 있고, 낮은 통로는 극장 무도회 홀과 연결되어 있으며 가장 위쪽 통로는 성 정원이 있는 겔러리로 통한다. 연결된 복도를 통과하기 위해서 성의 지붕을 가로질러서 작은 수도원까지 가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수도원으로 가는 통로가 폐쇄되었다.
다리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15세기 문서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다리는 나무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합스브륵의 루돌프2세 황제 때는 이 다리를 들어올릴 수 있는 도개교(跳開橋)로 불렀다.
이 지역의 새로운 주인이 된 통치자 에겐버르그(Johan Christian I. von Eggenberg)는 1686년 윗쪽에 있는 정원과 연결 할 새로운 나무다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복도를 덮은 부분의 첫 번째 나무다리는 1706년에 절반만이 만들어 졌다. 그 입구는 건물 2층 겔러리에 아직도 남아 있다. 그리고 극장과 다리는 계단으로 연결되었다. 1707~1708년엔 낮은 복도를 만들었다. 이 복도는 무도회 홀과 극장의 로얄 박스와 연결되어 있다. 1741년 프랑스가 침공 했을 때 망토다리 위쪽 긴 복도가 내려 앉았다. 그리고 1748-1749에 더 높게 다시 만들었다. 1764년 장기간에 걸친 다리 재공사 계획을 새웠다. 동쪽과 서쪽성의 마당을 연결하는 주요 부분은 돌로 만들었으며 낮은 복도도 새로 만들었다. 1777년 다리가 완전히 완공되면서 지금까지 남아있다

 

체스키크롬노프 성 (체스키크롬노프)

체스키 크롬노프(Chesky Krumlov)는 남부 보헤미아의 숲으로 뒤덮인 평원에 자리잡고 있는데, 13세기 어느 대지주가 S자를 그리며 흐르는 블타바 강변에 고딕 양식의 성을 건설함으로써 역사가 시작되었기에 7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입니다. 붉은 기와지붕을 이고 있는 중세풍의 건물들이, 도시의 출발점이라는 역사성에다 크기, 높이, 예술성으로 도시의 상징이 되어버린 크롬노프성을 중심으로 빼곡이 들어서 있어 마치 동화 속의 성으로 찾아 들어가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후대에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이 가미되어 특이한 외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국립 오페라극장 (비엔나)

빈 국립오페라는 성슈테판사원에서 케른트너슈트라세를 통해 이어진다. 음악의 도시 빈의 대표적인 오페라장인 만큼 바그너와 모차르트, 리하르트 슈트라으스 등의 오페라 연주에서 세계 제일이라는 평판을 듣는다. 또한 파리의 오페라 드 가르니에, 밀라노의 라 스칼라와 함께 유럽 3대 오페라 하우스로도 유명하다. 오페라 하우스, 링크를 중심으로 하는 건축물 가운데 최초로 완성된 곳으로. 오페린 링크와 케른트너 거리의 모퉁이에 있는 아름다운 르네상스 양식의 오페라 극장이다. 장려한 외관에 어울리게 내부도 고블란으 태피스트리와 모짜르트의 마적을 주제로 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화려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1869년 모짜르트의 (돈조반니)를 개관기념 작품으로 올렸다. 구스타프 말러가 음악감독으로 있던 1897-1907년 사이의 10년간이 전성기 였으나 제 2차 세계대전 때 많이 파괴되었다. 개축하면서 최신식 무대 장치를 갖춰 새로운 느낌으로 바뀌였으며 1977년 카라얀이 지휘봉을 잡으면서 제2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이 곳은 개관한 이래 5-6월에는 예술음악제, 오월에는 대무도회가 개최되는 등 연주호가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 매년 9월에에 시즌이 시작되어 연간 300회 이상 오페라 공연과 뮤지컬도 한다. 오전과 오후 두차례 실내 입장이 허용되는데, 오페라 하우스 좌측 모퉁이의 입구에서 표를 사면 언어별(영어,불어)가이드가 나와 약 30분 정도 내부를 구경시켜준다

 

쉔부른궁전 (비엔나)

쉔부른 궁전의 '쉔'은 아름답다는 뜻이고, '브룬'은 샘 또는 분수를 뜻하고 있다. 즉 아름다운 분수가 있는 궁전이라는 위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1744년에서 1750년까지 피가시의 손에 위해 완성된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숨결이 아직도 느껴지는 듯한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궁으로 베르사유 궁전에 견주어서 만들어진 화려한 왕궁이다. 한편 이 궁전은 그녀의 딸 마리아 앙뜨와네뜨가 15세까지 지내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궁전 내부에는 총 1441개의 방 중 45개만 공개하고 있는데 특히 모차르트가 6살 때 Maria Theresia 여왕 앞에서 연주와 구혼을 했던 Spiegelssaal '거울의 방'과 1814 ∼ 1815년에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 정세를 의논하기 위해 열린 빈 회의 때 화려한 무도회가 펼쳐진 '대 홀'과 나폴레옹 2세의 '회상의 방', 마리아 테레지아의 중국식 좌담실 Chainesisches Rund-kabinett등이 유명하다. 또한 실내 천장엔 프레스코화, 크리스텔 샹들리에와 금박 장식으로 멋지게 치장되어 있다.

이 밖에 궁전 내에는 1690에서 1918년까지의 마차가 전시되어 있는 궁전 마차 박물관(Wagenburg)이 있다. 중앙 건물은 황제의 생활관으로 이곳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프란츠 요셉과 마직막 황제인 카알 1세 등의 유물을 볼 수 있다.

궁전 건물을 지나면 약 1.7㎢에 달하는 끔찍하다고 할 만큼 잘 다듬어진 정원수가 너무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왕궁 정원이 나온다. 이 궁전 안의 공원은 고전과 결합한 로코코 양식의 아름다운 바로크 정원으로 툰의 생과 로마 유적 그리고 그리풍의 글로리에테가 있다. 이 곳에 오르면 훌륭한 전망을 볼수 있고 또한 화단의 기하학적인 아름다운 많은 분수, 조각상 등이 한데 어울러진 멋진 정원이다. 또한 700여종의 동물들이 있는 유럽에서 가장 오랜된 동물원이 있다. 또한 열대 식물원이 있다

 

슈테판 성당 (비엔나)

빈의 상징인 슈테판 사원은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 양식 건물로 하늘을 찌를 둣한 웅장한 자태를 자랑한다. 사원 안은 바로크 양식으로 되어 있는데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3세의 무덤도 있다.12세기 중엽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으나 1258년의 화재로 서쪽벽면을 제외한 전체 건물이 없어져 버렸다. 한 세기 반에 걸쳐 네이브가 고딕양식으로 건축되였다. 스테판 사원의 건축은 다양한 양식이 한데 어우러진 멋진 사원으로 정면을 감싸고 있는 전면부는 13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높은 뾰족탑과 현란한 스테인드 글라스는 고딕 양식이다. 성가대석 오른쪽 프리드리히 3세의 묘는 르네상스 양식, 그리고 이어진 주 제단 등은 바로크 양식으로 되여 있다.

137m 높이에 화살처럼 뾰족한 첨탑이 있는 거대한 이 성당에서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결혼식을 오렸으며 장례식을 치른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길이 65m에 넓이 35m의 십자가현의 성당 지붕은 선명한 청색과 금색 타일로 모자이크 되어 있다. 카타콤베라는 자하묘지에는 오스트리아 역대 왕들의 심장 및 내장이 수납된 항아리도 보관되어 있다. 이외에 각종 장기가 전시되고 있고 단체 관광으로만 관광이 가능하다.

대주교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타콤베 출입구는 성당 중앙의 왼쪽 허리 부분이며 북탑 입구에 있다. 남탑은 343개의 계단을 통해 70m 높이 테라스까지 올라갈 수 있다. 북탑의 테라스에는 푼메른이 있는데 이종은 원래 터키와의 전쟁으로 얻은 대포를 녹여 만든 것으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종이다. 북탑에는 리프트가 있어 쉽게 올라갈 수 있다.

남쪽의 큰 뜰을 지나 왼쪽의 좀 더 작고 지저분한 뜰로 들어가면 Royal Chapel(왕가 성당)과 왕가 보물 보관소(Schatzka-mmer)가 있는데, 이곳엔 1000년이나 된 유물과 보물, 그리고 왕관을 장식했다 보석들이 있다. 이 곳은 한 시간안에 관광 할 수 있는 곳이다

 

케른트너 거리 (비엔나)

빈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 오페라 극장에서 슈테판 성당까지 이르는 보행자 전용거리이다. 거리 양옆으로 각종 선물가게, 카페, 레스토랑이 몰려 있으며 간혹 거리에서 악기를 연주하거나 거리 공연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거리는 비교적 브랜드 있는 상점이 있는 곳으로 깨끗하게 정리된 거리다. 밤에는 상점에서 장식한 네온사인이 함께 어우러져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여행자들이나 현지인들이 많이 오는 거리다

 

모짜르트 생가 (짤쯔부르크)

잘츠부르크의 가장 중요한 여행지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중심 쇼핑가인 게트라이데 거리 9번지에 있는 당시 중산층이 거주하던 황색 건물 3층에서 1759년에 태어나서 17세까지 살았다. 어릴 때의 작품은 거의 모두가 이곳에서 작곡되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층에는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침대, 모차르트가 쓰던 바이올린, 낡은 피아노, 필사본 악보 그리고 초상화,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모차르트와 그의 오페라, 3층에는 모차르트의 가족들, 4층에는 잘츠부르크에서의 모차르트의 생활상이 소개되어 있다. 이 곳은 전 세계의 많은 음악 애호가들이 생가를 방문하고 있다

 

미라벨 정원 (짤쯔부르크)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정원으로, 지금은 일반인들의 공원으로 되었다. 이 정원은 17세기에 바로크 스타일로 디자인된 것으로, 분수와 연못, 대리석 조각물과 꽃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정원에 있는 미라벨 궁전은 1606년에 세워졌는데 1818년 화재로 수복되어 오늘날 같은 모습으로 되었다. 17세기초 디트리히 대주교가 사랑하는 여인 살로메를 우해 세운 궁전으로 대리석 홀은 모차르트가 대주교를 위해 연주했던 곳으로 지금은 실내악 연주를 열곤 한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무대에서 여주인공 마리아가 어린이들과 함께 '도레미 송'을 불렀던 곳이라 해서 더욱 유명해진 정원으로 유명하다. 장미 화원에는 조각들과 호수를 감상 할 수 있다. 이곳에서 호엔 잘츠부르크 성의 전경을 올려다 보면 성의 모습이 황홀할 정도다.

가는방법

중앙역에서 Rainerstrasse를 따라 조금만 내려오면 바로 오른편에 있다

 

짤쯔부르크 대성당 (짤쯔부르크)

잘츠부르크의 음악제가 처음 시작된 대성당 광장에 있는 대성당은 구시가의 중심에 있다. 이 곳에는 1771년에 제작된 마리아 상이 서 있다. 원래의 대성당은 8세기에 지어졌으나 화재로 파괴되었다. 현재의 돔은 17세기 초 40년에 걸쳐 완공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말기적 성격을 띠고 있는 바로크식 건축물로 이곳에서 1756년 모짜르트가 세례를 받았다.

입구에 들어서면 대리석 조각상인 베드로와 바울, 잘츠부르크의 수호 성인 들이 있다. 세계의 청동 대문은 믿음, 소망, 사랑을 상징한다. 안에는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 데 6천가닥의 파이프가 사용되어졌고, 음색을 바꾸는 레지스터의 수도 101개나 된다고 한다. 또한 10000명을 수용할수 있는 알프스 이북에서 가장 큰 바로크 성당이다. 대성당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대성당의 보물, 그림, 시계, 가구등을 전시하고 있는 대성당 박물관이 있다

 

호엔짤쯔부르크 성 (짤쯔부르크)

호엔잘츠부르크 성은 원래 1077년에 게브하르트 대주교 지시하에 건축이 시작하여 17세기에 지어진 중세의 성으로 구시가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시내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잘츠부르크의 상징물이다. 동시에 중유럽에서 현재까지 파손되지 않고 보존된 성들 중 가장 큰 성으로서 웅장한 성의 그림자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 중 하나이다.

이곳은 석회암 위에 세워졌는 잘츠흐강 보다 120m 높이로 세운 웅장한 대주교 성채이며 성 안에는 의식 홀과 황금홀, 1501년에 만든 고딕 앵식의 마 요르카구이 난로, 1501년에 만든 수동식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 이 오르간은 하이든, 모차르트가 쓰던 것이다. 또한 건축물 내부에는 부르크 박물관이 있어 중세의 고문기구, 무기류, 공예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구경거리가 있어서 흥미 진지한 곳이다

 

 

[ 모두투어 온나라여행사]

[ 문의 : 055 : 283-8385 ]

[ http://www.onnaratour.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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